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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의 상징적 의미 - 김병주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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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회수
7591
내용

 

6월의 상징적 의미 : 인내를 통한 완성의 수 6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창세 1,31-2,1)

 

그리스어로 '헥사드(hexad)'라 불리는 숫자 6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데에 필요로 한 수()로 완전과 조화를 상징합니다. 또한 6은 결속과 친화의 수이자 인내를 통한 완성의 수이기도 합니다.

 

5를 계속 곱한 수는 항상 끝자리 수가 5인 것처럼(5, 25, 125, 625...), 6을 계속 곱한 수는 항상 끝자리 수가 6이 나옵니다(6, 36, 216, 1296...) 이에 피타고라스는 6형태의 형태요, 닳지 않는 모루라고 하였습니다.

 

6은 완전한 구조와 작용, 그리고 질서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63을 두 배한 것으로 헥사드(6)는 트리아드(3,삼위일체)의 균형 잡힌 구조 원리를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주역이었던 그리스인들은 여섯이라는 숫자를 평형, 조화, 창조를 나타내는 완전한 숫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숫자 61, 2, 3으로 구성된 수로 세 수를 더하여도 6이 되고 곱하여도 마찬가지로 6이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6이 모든 부모(12)와 그들 사이에 태어난 최초의 자식(3)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그런 이유로 완전한 전체를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인은 그것을 부분의 완성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성인은 팬타드(5)와 헥사드(6)를 결혼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여성의 수인 2와 남성의 수인 3의 상호작용과 함께 부모처럼 자신과 똑같은 자손을 낳는 수는 5(=2+3)6(=2×3)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최초의 짝수인 2(여성을 나타내는 수)와 최초의 홀수인 3(남성을 나타내는 수)을 곱해서 얻어지는 수인 여섯은 우주를 나타내는 동시에,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냅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섯은 다섯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체를 나타냅니다.

 

머리와 몸통, 두 팔과 두 다리를 더한 수가 여섯이고, 또 얼굴에 있는 기관인 두 눈, 두 귀, 코와 입을 더한 수도 여섯입니다. 또한 인체에서는 이목구비(耳目口鼻)와 대 소변 배설구를 합쳐 육공(六孔)이라고 하며, , , 대장, 소장, 삼초(三焦), 방광을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육부(六腑)라고 하고 부모, 형제, 처자의 가족 전체를 육친(六親)이라고 합니다.

 

중국 문화에서도 하나의 주제를 여섯 가지로 분류한 경우가 많습니다. 병서(兵書)로 육도(六韜)가 있으며 예법에 육례(六禮)가 있으며, 한자의 분류법으로 육서(六書)가 있습니다. 또한 교육에 육예(六藝)와 육유(六喩)가 있으며, 시 작법에 육의(六義)가 있고, 법전에는 육전(六典)이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배워 간직해야 할 도리에 대해 전해 주는 경전이 여섯 있는데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춘추(春秋)입니다. 이 중 역경(易經)64괘는 6()로 이루어져 있고 이 효는 음양의 구별이 있습니다. 또한 동서남북 사방(四方)에 천지(天地) 상하(上下)를 합친 것을 육합(六合)이라 하여 온 우주를 나타냅니다.

 

불교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실천의 근간이요 보살의 수행에 대한 덕목으로 6바라밀다(波羅蜜多)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입니다.

 

한편, 동양이나 헬레니즘 문화권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6이 양면성을 지닌다고 보았습니다. 6은 완성과 균형을 암시하면서도 타락의 표시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 이유로 여섯은 가장 완전한 행운의 수인 일곱보다 하나가 적은 수로, 악덕과 불완전을 나타내는 불운의 숫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성경 창세기에 따르면, 여섯째 날은 창조를 끝낸 완성과 완전의 날인 동시에 아직 하느님의 강복을 받지 못한 미완성의 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된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타락과 불완전함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섯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섯이라는 숫자가 불완전과 불길함을 상징하는 예증은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예수가 운명한 날도 1주일 중 여섯째 번 날이고,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여섯이 세 번 겹친 ‘666’이라는 수는 짐승의 표지이며, 가장 사악한 적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신화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때 해와 달과 별은 물론 바다와 식물, 동물,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엿새 만에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창조과정의 패턴이 여섯(6)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모든 차원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일하는 날을 6일로 정하고 그 다음 날은 안식일로 휴식을 취했습니다.

 

농경지 역시 6년 동안은 경작을 하고 씨를 뿌려 수확하지만 7년째 되는 해에는 이를 휴경지로 만들었습니다(출애 12,10-11). 또한 이집트로부터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6월절 축제에서도 축제 기간 중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6일 동안 먹은 후에야 평소대로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또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나 6, 12, 60, 360, 600과 같은 수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것은, 무한한 우주를 그 수학적 이상에 비추어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수들의 일치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우주를 통합된 전체로 인식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곧 구조-작용-질서 또는 공간--시간을 하늘의 리듬이나 차원과 조심스럽게 통합시키면 하느님의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6을 상징하는 별(다비드의 별 또는 헥사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핵사그램은 두 삼각형, 즉 꼭지가 하늘을 보는 정삼각형과 꼭지가 땅을 보는 역삼각형이 온전히 결합한 모습입니다.

 

정삼각형은 땅, 고요함, 평화를 표현하며 여성을 상징하고, 역삼각형은 하늘, 움직임, 용맹을 표현하며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비드의 별은 바로 사랑, 결혼, 우주를 표현하는 것으로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육각형별(헥사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종교와 전설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인장이라고 불렸으며, 유대인들은 이 상징을 다윗의 방패라 하면서 높이 받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힌두교도들 사이에서는 이것은 비슈누(브라마, 시바와 함께 힌두교 3대 신의 하나인 보존 신)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육각형별은 두 삼각형의 만남 즉, 하늘과 땅의 만남, 신과 인간의 만남, 정신과 물질의 만남, 남성과 여성의 만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헥사그램은 서로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과 완성을 지향하게 됩니다.

 

밤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을 보십시오. 광대한 우주 속에 그저 잠시 지나가는 우리는, 사람의 숨 한 번에서 태양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너머의 무한함 안에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와 패턴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헥사드는 땅에서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는 인간의 소망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하느님의 자기양여 즉, 은총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성한 만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과 혼과 영을 가진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이 완전하면서도 독창적인 기하학적 구조는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 사랑을 꿰뚫어볼 수 있는 신적 지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적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겸손하면서도 가난한 마음일 것입니다.

 

만일 존재의 전체성을 지향하는 두 만남 사이의 조화와 균형이 깨어질 때, 즉 완전함의 질서에 도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하늘 높이 치솟을 때, 인간은 교만과 타락으로 인한 불행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과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자신의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머리 위와 발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의 악을 보고 흥분하지 말고, 그들의 선을 보고 질투하지 말며, 절대선(絶對善)에 대한 지나친 탐욕을 버리고, 인간적인 지혜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분별심(分別心)을 비울 때, 비로소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참으로 가난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9-30)

 

오늘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들의 성화를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제들로 거듭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6월에 자연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기쁨이 회원 님들의 가슴에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_____^*

 

 

< 참고문헌 >

 

Michel Christiaens, 장익 옮김(2002), 성서의 상징, 분도출판사.

Michel Feuillet, 연숙진역(2004), 그리스도교 상징사전, 보누스.

Otto Betz, 배진아. 김혜진 역(2009). 숫자의 감춰진 비밀, 푸른 영토.

명백훈(2006), 숫자 6 질서와 완전함 경향잡지 6월호.

한국문화상징사전편찬위원회, 한국문화상징사전 2, 동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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